유럽 축구 라리가

레알의 유소년 골키퍼였다가 세계적인 가수가 된 인물

[풋볼 트라이브=류일한 기자] 누구나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좌절한다.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심각한 병으로 몸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극복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를 극복한 이들을 놓고 우리는 ‘인간 승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다.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수이다. 총 3억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그는, 공교롭게도 과거 레알 마드리드의 제휴 클럽이자 현재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인 플루스 울트라 소속의 골키퍼였다. 그러나 그는 운명을 바꾼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레알의 골키퍼가 아닌 세계적인 가수가 됐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1943년 9월 23일, 스페인의 수도이자 레알 마드리드가 연고를 두고 있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였으며, 법학사평론가로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던 사람이었다.

 

사그라도스 코라소네스의 골키퍼였던 그는 1961/1962시즌에 레알의 제휴 클럽이자 유소년 클럽이었던 울트라와 계약을 맺었다. 이글레시아스에게는 ‘레알의 미래를 짊어질 골키퍼’라는 거대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1963년 10월 22일. 친구들과 함께 마을 축제를 즐기고 귀가하던 이글레시아스는 불행히도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척추와 하반신 신경이 마비됐다.

 

꿈이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반사 신경과 점프력이 중요한 골키퍼였던 이글레시아스는 해당 사고로 축구 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해당 사고는 이글레시아스에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당시 레알은 ‘예예(Yé-yé)’라고 불리는 독특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 정책은 오직 스페인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바탕으로 이글레시아스처럼 울트라 소속이었던 일부 선수는 레알 선수가 됐다. 만약 이글레시아스가 교통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레알의 골문을 책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교통사고는 이글레시아스에게 꿈과 희망을 앗아갔다. 좌절한 그에게 앞에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이글레시아스는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을 겪었다.

 

아버지는 1년 동안 아들을 병간호했다. 그리고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라며 아들을 격려했었다. 하지만 이글레시아스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일을 쉴 수 없었던 아버지는 병원 일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아들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을 위해 책과 기타를 선물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이글레시아스는 아버지의 선물인 책을 읽으며 문학적인 소양을 길렀고, 기타를 쳐보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글레시아스는 엄청난 음치였다. 그러나 축구 선수의 꿈이 사라진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라디오나 TV를 들으며 음악을 따라 부르거나, 작곡하기도 했다. 남들이 교통사고로 인해 좌절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년 동안 이글레시아스는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꿈을 키우며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글레시아스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4살이 되던 해에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68년 스페인의 ‘베니도름 국제 노래 페스티벌’에서 그가 작곡하고 부른 노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노래 제목은 ‘La vida sigue igual’이었다.

 

이후 이글레시아스는 음반사 CBS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하며 스페인과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다. 그는 2010년 11월 기준으로 3억 장이 넘는 앨범을 판매했고, 가장 많은 언어로 앨범을 제작한 가수로 기네스북에도 오르는 영광을 수상했다.

 

이글레시아스는 레알의 골키퍼가 되지 못했지만,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수로 성공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