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 프리미어 리그

에드워즈, 맨체스터의 만개하지 못한 꽃

[풋볼 트라이브=류일한 기자] 지난 6일은 뮌헨 참사 60주기였다.

 

1958년 2월 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유고슬라비아의 FK 크르베나 즈베즈다와 유러피언 컵(현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원정 경기를 치르고 귀국 중이었다. 선수단이 탄 비행기는 경유지인 뮌헨 공항에서 이륙하던 도중 기체가 전복됐다. 해당 사고로 8명의 선수와 구단 스태프, 취재 기자단을 통틀어 총 23명이 사망했다.

 

그중 1명의 죽음은 잉글랜드와 맨유의 희망을 앗아갔다. 21살밖에 안 됐던 선수의 이름은 바로 ‘던컨 에드워즈’였다.

 

에드워즈는 1936년 잉글랜드의 더들리에서 태어났다. 1952년 맨유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축구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년 후 1군에 승격해 카디프 시티 FC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6살이었다.

 

때마침 이때 맨유의 감독이었던 맷 버스비는 에드워즈를 비롯해 데니스 바이올렛과 재키 블란치플라워 같은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맷 버스비의 아이들’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버스비 밑에서 기회를 잡은 에드워즈는 1953/1954시즌 때 리그 24경기를 출전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33경기를 출전해 주전으로 도약했다.

 

강력한 슈팅과 뛰어난 피지컬을 앞세우며 상대를 위협했던 에드워즈의 본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풀백을 비롯해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에드워즈를 앞세운 맨유는 1955/1956시즌과 1956/1957시즌 때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훗날 잉글랜드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던 보비 찰튼은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 내게 열등감을 준 유일한 선수”라고 에드워즈를 평가했다.

 

초대 발롱도르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는 “성난 바다 위에 떠 있는 바위 같다”며 에드워즈의 재능을 극찬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토미 도처티는 “조지 베스트와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모두 훌륭했지만, 그중에서도 에드워즈는 최고였다”고 말했다.

 

뛰어난 선수는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는다. 에드워즈는 1955년 4월 2일. 18년하고도 183일의 나이에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표팀에 데뷔한 잉글랜드 선수 중 최연소 기록이었다. (그리고 1998년에 18살 59일 나이에 데뷔한 마이클 오언이 갱신했다) 말 그대로 맨유와 잉글랜드의 희망이었던 셈.

 

맨유는 당시 최강의 팀이었던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마로 손꼽혔다. 레알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프란시스코 헨토, 레몽 코파, 호세 산타마리아 등 50년대 최고의 선수들을 데리고 있던 팀이었다.

 

두 팀은 1956/1957시즌 유러피언 컵 4강에서 만났다. 하지만 맨유는 종합 5:3으로 패했고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만 했다.

 

유러피언 컵 우승에 실패했지만, 에드워즈는 1957년 발롱도르 수상식 때 16표를 받으며 코파와 함께 3위를 차지했다. (당시 수상자는 디 스테파노였다) 디 스테파노와 코파보다 어렸기에 운이 따랐다면 훗날 발롱도르를 수상했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늘은 에드워즈에게 운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다리와 갈비뼈를 비롯해 심각한 골절상을 당했고 신장이 손상됐다. 의사들은 선수가 부상에서 회복해도 예전처럼 뛸 수 있을 거라 보지 않았다.

 

인공 신장을 이식한 에드워즈는 오히려 인공 장기 때문에 혈액 응고 능력이 감소하면서 내출혈이 생겼다. 그런데도 수석 코치였던 지미 머피에게 “울버햄튼 원더스 FC와 경기는 언제 시작되지? 그 경기를 놓쳐서는 안 돼”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2월 21일 신장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사망했다.

 

이후 맨유는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다. 버스비는 사고에서 살아남은 찰튼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하기 시작했고 이후 데니스 로와 조지 베스트를 영입해 다시 부흥했다.

 

그렇지만 에드워즈의 죽음은 맨유와 잉글랜드에 거대한 비극이었다. 많은 전문가의 말대로 뮌헨 참사가 없었다면 맨유는 레알과 함께 50년대를 양분했을 것이다.

 

60년대를 이끌었던 에우제비오의 SL 벤피카와 산드로 마졸라와 지아친토 파케티의 FC 인터 밀란, 지아니 리베라와 체사레 말디니의 AC 밀란 등과 함께 60년대를 주도했을 수도 있다.

 

잉글랜드는 펠레의 브라질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 지금보다 더 많은 월드컵 우승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죽음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사진 출처=풋볼 트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