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다
많은 한국 사람이 스페인 내전 이후 권력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레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프랑코 덕분에 로스 블랑코스가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레알은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 1953년까지 무려 10년이 넘는 긴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들의 마지막 라리가 우승은 1933년이었는데, 1953년이 돼서야 20년 만에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오히려 이 기간에 라리가에서 우승을 많이 차지했던 구단은 바르셀로나(5회)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4회)였다.
레알이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아닌, 베르나베우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베르나베우가 레알의 회장직에 취임했던 1944년은 구단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당시 로스 블랑코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당시 레알의 홈구장인 차마르틴 구장은 공습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관중석은 불을 때기 위해 목재를 가져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허물어졌었다. 그라운드는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다. 선수들이 앉아있어야 하는 벤치 역시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승 트로피 도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과 팀에 남아있는 선수들이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1943년에 레알 회장으로 복귀한 베르나베우는 새로운 구장을 짓기로 했다. 1944년 6월 22일, 산업 상업 은행이 경기장을 건설할 부지를 살 자금을 융자해줬다. 그리고 1944년 9월 5일, 건축가인 마누엘 무뇨스 모나스테리오와 루이스 알레마니 솔레르가 새로운 구장을 짓는데 뽑혔고, 1944년 10월 27일, 새로운 경기장 건설이 시작됐다.
이 기간에 베르나베우는 레알이 다시 한 번 강팀으로 도약하기 위해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구단의 이름 역시 ‘마드리드 F.C에서’ 다시 ‘레알 마드리드’로 개명됐다.
그리고 1947년 12월 14일 차마르틴 구장이 새롭게 개장됐고, 레알과 OS 벨레넨세스의 개장 기념 경기가 열렸다. 당시 경기장의 총 수용 인원은 75,145명이었으며, 27,645개의 좌석과 47,500개의 입석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