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트라이브=류일한 기자] 어린 시절부터 사학과 진학을 꿈꿨던 필자는 ‘페르시아’를 좋아했다. 어감이 좋았던 부분도 있지만, ‘아라비안나이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에 대제국을 건설한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처럼 ‘이란’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매력적인 이야기가 넘쳐흐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란은 매력적인 이야기가 사라졌고 탄압과 외교적 갈등이 넘쳐흐른다. 특히,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갈등을 빚으며 중동과 국제 사회의 근심거리가 됐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의 갈등은 축구 시장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요소이기도 하다.
지난 1부에서 사우디의 내부적 변화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 편에서는 이란의 내외부적 변화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해당 칼럼에는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 축구 외적인 이야기, 즉 현재 중동의 상황까지 다뤘음을 미리 밝힌다. 해당 칼럼 작성을 위해 ‘풋볼 트라이브 아랍 에디션’과 ‘이란 에디션’에 자문했다.
➀불안정한 이란의 지배 체제
본래 이란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나라였다.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팔리비 왕조가 근대화를 위해 국가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소련의 침공을 받으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팔라비 1세는 아들인 팔라비 2세에 제위를 양위했다. 여기에 석유 국유화를 추진했던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서방 국가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당해 실각했다.
이를 지켜본 팔라비 2세는 본인과 왕가를 수호하기 위해 친(親) 서방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미국 역시 소련을 견제해야 할 보루가 필요했기에 이란과 외교적 관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1978년에 발생한 아바단 극장 방화사건과 검은 금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반(反) 왕정 시위가 대두됐다. 팔라비 2세는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 조치를 취했지만, 1979년에 발생한 이슬람 혁명 때문에 폐위됐다.
이후 이란은 아야톨라(페르시아어로 ‘하나님의 신호’라는 뜻. 시아파의 고위 성직자에게만 주는 칭호)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한 이후부터 철저한 극단적 이슬람 사회로 돌아섰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호메이니 이후 집권한 알리 하메네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과거 이란은 지도부의 교체로 체제 변화가 잦았다. 체제의 불안은 여러 산업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중에서도 스포츠를 비롯한 대중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지도층이 정치적 목적으로 스포츠를 활용하기 때문.
이란도 마찬가지. 팔라비 왕조 시절 영국인들에 의해 전파된 축구는 큰 인기를 누리며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팔리비 2세도 축구를 좋아했기에 축구 산업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그 결과 이란은 1970년대에 성인 및 청소년 국가 대표 팀이 아시아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췄다.
그러나 이란의 축구는 호메이니가 집권한 것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사회 자체가 극단적 이슬람주의로 변해 서양 문물을 탄압했기 때문.
축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래 다수의 이슬람교도는 축구를 서양 문물의 산물이라며 그 자체를 혐오하는 경우가 많다. 호메이니 역시 축구가 이슬람의 교리를 어지럽히는 악의 산물이라 여겼다. 헤크마티야르도 호메이니 같은 이들은 집권 이후 축구장을 반대파와 여성들을 공개 처형하는데 사용했을 정도.
그래서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자마자 이란에서 축구를 영원히 할 수 없도록 금지령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지지층을 비롯해 혁명의 주동자들과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다. 이에 호메이니는 축구를 탄압하는 대신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해 국민들의 불만을 줄였다.
큰 고비를 넘긴 이란 축구는 호메이니의 아들인 아마드 호메이니가 잠시 축구 선수를 할 정도로 인기를 유지했다. 얼마 전 정계에 진출한 그의 손자 하산 호메이니 역시 축구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란의 축구는 지도부와 주변 국가들의 외교 문제로 잦은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후술할 사우디와 미국, 러시아 등과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➁이란을 견제하는 사우디
사우디와 이란은 역사적으로 오랜 앙숙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 이슬람교의 종교적 대립도 있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부터 이어진 역사적 대립이 깊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양국의 갈등은 개선되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사우디는 석유 산업과 미국 정부의 가호 아래 체제 안정과 막대한 부를 얻었다. 여기에 메카와 메디나라는 이슬람교의 성지를 앞세우며 중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석유가 있는 한 사우디는 계속해서 중동의 패권을 잡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우디는 이란을 두려워한다. 이란이 그들을 밀어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란은 약 80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나라답게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고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여기에 사계절이 뚜렷하고 (사막화 현상으로 줄어들었지만) 비옥한 농토가 많다. 따라서 이란은 사우디가 반드시 견제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특히, 사우디의 알 사우드 왕가는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때 미국 정부가 뒤에서 독재자들의 숙청을 주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불안감에 빠졌다. 여기에 이란이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제재에서 벗어나고 관계 개선에 돌입하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사우디는 지난 2016년 1월 2일,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셰이크 님르 알 님르를 반정부 시위 및 테러 주도 혐의 죄로 몰아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집단 처형했다. 이에 반발한 이란의 강경 보수파들은 사우디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공격했다.
해당 사건 이후 두 나라는 단교를 선언했다. 사우디의 살만 빈 압둘 아지즈 현 국왕은 내외적으로 어수선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세자였던 조카 니예프를 축출했다. 그리고 친아들인 무하마드를 왕세자로 세우며 체제 변화를 꾀했다. 현재 왕세자는 본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 이란을 위협하고 있다. (1부 내용 참고)
외교적인 문제는 이란 같은 나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사우디는 알 사우드 왕가 체제와 미국이라는 우방국이 있기에 안정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지만, 이란은 사우디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등 외교적 충돌이 잦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제재를 받았던 만큼 스포츠 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의 규모가 한정적이다.
결정적으로 두 나라의 분쟁이 사실상 축구 시장의 미래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가(油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➂유가(油價)
사우디가 시아파 종교 지도자를 처형한 이유는 바로 동부 지역이 자신들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국가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시아파가 밀집해 사는 곳인데, 국가 유전의 8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걸프 바닷물을 담수해 수도 리야드에 공급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우디의 생명 줄이다.
그러나 근처의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의 영역이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산유국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다. 하루 평균 14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며 약 1천 5백만 배럴 이상의 원유(2011년 기준으로 세계 해상 석유 수송량의 35%, 세계 모든 석유 거래량의 20%에 해당하는 양)를 수송한다.
이란이 이곳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해협은 사실상 봉쇄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란이 자국 영토에 대한 주권 행사이기에 합법적이면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 항의할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만약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가 지금보다 심화한다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다. 이것은 유가 상승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석유 재벌들은 저유가 시대로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유가 상승으로 다시 고유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더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악화된다면 무하메드 왕세자가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이란 역시 사우디의 동부 지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석유와 관련된 산업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아니, 전 세계 경제 자체가 또 한 번 거대한 불황을 맞이할 것이다.
물론, 유전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다. 그렇게 되면 사우디와 이란 모두 엄청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양 국은 지금처럼 단교나 위협을 가하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교의 장기화로 고유가 시대에 접어든다면, 세계 경제는 다시 한번 불안정해진다. 이것은 환율 시장을 변덕스럽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전 세계는 2019년에 인구 절벽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높은 환율과 인구 감소 문제로 또 한 번의 대공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스포츠는 경제와 밀접하다. 축구도 마찬가지. 과거 축구 산업은 2007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겪으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적이 있다. 당시 유럽 구단들의 소유주는 대부분 자국 구단주였지만, 대공황 이후 외국 구단주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오늘날 축구계는 다가올 공황을 대비하기 위해 자생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지만, 경제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다시 구단주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가들에게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업이 어려워지면 구단주들은 투자를 포기하고 긴축 재정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들은 아예 구단을 매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막대한 부를 앞세워 축구 시장을 어지럽힐 수 있다. 즉, FIFA나 UEFA에서 특별한 조치를 내리지 않는다면, 축구 산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사실상 축구 산업의 미래는 사우디와 이란, 그리고 3부에서 다룰 카타르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이란과 사우디의 갈등으로 막대한 영향을 받는 카타르와 미래의 축구 시장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 하산 호메이니 SNS 계정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