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 프리미어 리그

[스승의 날 특집] “리버풀•맨유 특집이 아닌데…”스승의 은혜 못잖게 큰 감독의 은혜: EPL 편

[풋볼 트라이브=류일한 기자] ‘스승의 날’은 사람들이 은사를 기리는 날이다. 이날 많은 사람이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방문해 인사를 드리거나, 학창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축구도 마찬가지. ‘감독의 날’은 없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떤 감독들이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을까. 혹은 팀의 미래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까. 현재 프리미어 리그 팀들을 이끄는 감독들은 제외했다.

맷 버스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버스비는 지금은 맨유 최대의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 FC와 리버풀 FC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1945년 1월에 맨유와 감독 계약을 맺었다.

버스비는 맨유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그 결과 맨유에는 1950년대 들어 던컨 에드워즈와 보비 찰튼을 비롯한 전설적인 선수들이 등장했다.

이들을 앞세운 맨유는 당시 세계 최강의 팀이었던 레알 마드리드와 유러피언 컵(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놓고 다퉜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회장은 버스비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이 스코틀랜드 감독은 “맨체스터가 저의 천국입니다”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1958년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뮌헨 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고로 에드워즈를 비롯한 많은 선수가 사망했다. 조니 베리를 비롯한 일부 선수는 부상이 심해 은퇴했다. 버스비 역시 중상을 입었다.

맨유 감독직에 돌아온 버스비는 좌절하지 않고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 찰튼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다. 1967/1968시즌에는 잉글랜드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버스비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86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오기 전까지 맨유는 예전만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빌 샹클리 (리버풀 FC)

샹클리의 선수 시절은 리버풀과 아무 연관이 없었다. 칼라일 유나이티드와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선수 생활을 보낸 이 스코틀랜드 감독은 1949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칼라일과 허더즈필드 타운 같은 팀들을 이끌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가 1959년에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리버풀은 5시즌 동안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던 팀으로, 명문 구단과 거리가 있었다.

샹클리는 부임 첫해 구단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지 못했지만, 팀을 차근차근 개편했다. 그리고 리버풀은 1962년에 1부 리그로 승격했다.

이후 리버풀에는 엠린 휴즈와 케빈 키건과 존 토샥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등장했다.

리버풀은 샹클리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1부 리그에서 3회 우승과 두 번의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1972/1973시즌에는 UEFA 컵에서 우승했다.

잉글랜드 최강의 팀으로 성장한 리버풀이었지만, 샹클리는 1974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비록 버스비처럼 유러피언 컵 우승은 없었지만, 샹클리는 리버풀이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단으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밥 페이즐리 (리버풀 FC)

페이즐리는 1939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을 리버풀의 선수로 뛰었다. 은퇴 후에는 리버풀의 코치가 되면서 샹클리를 보좌했다. 그리고 1974년에 리버풀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페이즐리는 1975/1976시즌에 샹클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리버풀의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년 후에는 1부 리그와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페이즐리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있던 시절에는 단순히 성적만 좋았던 것이 아니다. 케니 달글리시와 이안 러쉬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리버풀은 페이즐리 체제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이 기간에 1부 리그에서는 총 여섯 번을 우승했다. 무엇보다 유러피언 컵에서 세 번을 우승했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그 어떤 감독도 유러피언 컵에서 세 번이나 우승하지 못했다. 전 세계 축구 역사를 통틀면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뿐이다. 그만큼 페이즐리 시절의 리버풀은 세계 최강의 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페이즐리는 1983년에 은퇴했다.

조 페이건 (리버풀 FC)

페이건은 샹클리처럼 선수 시절에 리버풀과 아무 연관이 없었던 인물이다. 이 잉글랜드 감독은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리버풀의 2군 코치로 활동하게 됐다. 그러다가 1971년에 1군 코치로 승격했다. 1974년에는 페이즐리의 수석 코치로 일했다.

페이건은 1983년 페이즐리의 후임으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았다. 부임 첫해 유러피언 컵과 1부 리그, 그리고 리그 컵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1984/1985시즌에는 1부 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두 시즌 연속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미셸 플라티니가 버티고 있는 유벤투스에 졌다. 설상가상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헤이젤 참사’가 그 경기에서 벌어졌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페이건은 은퇴했다. 설상가상 리버풀을 비롯한 잉글랜드 구단 전체가 UEFA로부터 국제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80년대 황금기를 누렸던 잉글랜드 축구의 전성기가 끝났다. 리버풀은 샹클리와 페이즐리, 페이건으로 이어졌던 왕조가 마침표를 찍었다.

브라이언 클러프 (노팅엄 포레스트 FC)

오늘날 노팅엄 포레스트가 어떤 팀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팀은 리버풀과 함께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차지한 잉글랜드 구단이다.

더 놀라운 것은 1부 리그 승격과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2연패가 불과 4년 안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만든 인물은 클러프였다.

이 잉글랜드 감독은 미들즈브러와 선덜랜드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1965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1975년 노팅엄의 감독으로 부임한 클러프는 1977년에 2부 리그 팀이었던 노팅엄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년 후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유러피언 컵에 진출한 노팅엄은 구단 역사상 최초의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년 후에도 빅 이어를 거머쥐었다.

이 잉글랜드 감독은 불과 4년 만에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지만, 이후 팀은 힘을 잃었다. 결국, 1993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스코틀랜드에서 주로 선수 생활을 보냈던 퍼거슨은 1974년부터 감독직을 맡았다. 1978년에는 에버딘 FC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1982/1983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FC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을 격파하고 우승했다.

이런 퍼거슨을 눈여겨 본 맨유는 1986년에 그와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당시 맨유는 버스비가 은퇴한 이후 예전만큼 강팀이 아니었다.

퍼거슨은 부임 초에 영국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묵묵하게 버텨내며 팀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등 뛰어난 유소년 선수들이 등장했다. ‘퍼기의 아이들’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을 놓고 일각에서는 “어린아이들만으로 우승할 수 없다”고 혹평까지 했다.

그러나 퍼거슨의 맨유는 이후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998/1999시즌에 챔스에서 우승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맨유는 퍼거슨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총 13회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과 다섯 번의 FA 컵, 두 번의 챔스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스코틀랜드 감독은 2013년에 은퇴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첼시 FC, 레스터 시티 FC)

라니에리는 AS 로마와 칼치오 카타니아를 비롯한 세리에A 팀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1986년부터 감독직을 시작한 라니에리는 SSC 나폴리와 발렌시아 CF,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같은 명문 구단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2000년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라니에리는 존 테리와 프랭크 램파드 같은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당시 첼시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이러한 라니에리의 지도 하에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냈다. 만약 라니에리가 없었다면, 그의 후임으로 온 조세 무리뉴 감독이 당장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탈리아 감독은 2004년에 경질됐다.

이후 여러 팀을 떠돌았던 라니에리는 2015년에 레스터 시티 F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레스터는 강등권 싸움을 펼쳤던 팀으로 우승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라니에리의 레스터는 첫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제이미 바디와 리야드 마레즈, 은골로 캉테를 앞세운 이 잉글랜드 팀은 디펜딩 챔피언인 첼시 FC를 비롯해 강팀들을 차례대로 격파했다.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거둔 라니에리였지만, 이듬해 팀이 부진하자 경질됐다.

그러나 그가 레스터에서 이룬 업적은 앞으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