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트라이브=정미현 기자] 파올로 디 카니오는 일찍이 친정팀 SS 라치오가 “규격화에 저항하는 시민의 권리가 있는 곳”이라 예찬한 바 있다. 그래서 구단의 서포터에게 ‘나치식 경례’를 했단다. 경례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공유한다는 소속감이 생긴다면서.
규격화에 대한 저항과 소속감 – 다소 위화적인 조합이지만, 아무래도 사소한 문제였나 보다. 라치오의 열성 팬들은 디 카니오의 인터뷰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탈리아는 이에 분노했다. 혹은, 분노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축구협회는 해당 행위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로 했다.
그렇게 디 카니오에게는 7,000유로(한화 약 927만 원)라는 벌금이 매겨졌다.
당시 이탈리아 총리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디 카니오를 “과시욕이 강할 뿐, 좋은 녀석”이라 칭했다. “좋은 녀석.” 나치 경례를 하고, 무솔리니를 추종하는 “좋은 녀석.” 약 300명의 사상자를 만든 전체주의적 테러리스트의 장례식에 참석, 조의까지 표한 “좋은 녀석.”
7,000유로짜리 분노는 그렇게 끝이 났고, “좋은 녀석” 디 카니오는 이탈리아로부터 용서받았다.
지난 22일, 라치오의 극성팬들이 안네 프랑크의 사진에 AS 로마의 유니폼을 합성, 로마 올림피코 스타디움에 게시했다. ‘로마 팬들은 유대인들’이라 적힌 스티커와 함께였다.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열악한 은신처에서 2년이 넘게 살아야만 했다. 발각된 후에는 그 지독하고 악질적인 수용소로 압송되었으며, 끝내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만 15세 한참 어린 나이에 숨졌다.
라치오 팬들은 바로 그 안네 프랑크를 이용해 연고지 라이벌을 향한 증오를 나타냈다. 확실히, “좋은 녀석” 디 카니오와 “진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라치오는 “진정한 가치”를 부정했다. 이탈리아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진 덕이다. 라치오의 선수들은 경기 전 안네 프랑크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으며 사태 진압에 나섰다. 클라우디오 로티토 라치오 회장 역시 유대교 예배당에 방문해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했다.
그리고 25일, 한 음성 파일이 공개됐다. “해야만 하는 연극”이라는 말이 들렸다. 로티토의 목소리였다. 유대교 예배당 방문이, 희생자를 위한 추모가, 로티토 라치오 회장에게는 쇼에 불과했단다.
이탈리아의 분노는 역시 이번에도 사소했다.
축협은 경기 시작 전 유대인 희생자를 위해 묵념한 후, “안네의 일기” 중 한 대목을 낭독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벤투스의 서포터들은 묵념의 시간 동안 시위를 일으켰다. 일기 낭독 중 국가 제창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토리노 감독은 “안네 프랑크가 누군지 모르겠다. 나는 신문을 안 읽어서 이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런데도 로티토가 진심으로 반성할 리 만무하다.
안네 프랑크는 일기에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들의 본성만큼은 선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 와중에도 기대를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분노는 이번에도 사소했지만, 7,000유로보다는 비쌀 것이라고.
실제로도 그렇다. 우선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충격을 표했다. 과거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디 카니오를 옹호한 것과는 정반대다. 루카 로티 체육부 장관도 책임자 처벌을 강조했다. 라치오 역시 앞으로 매년 200명의 팬들을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초청해 역사 인식 개선에 힘쓰겠노라고 약속했다.
물론 회장의 발언을 보면, 구단은 이 사건을 가벼이 여기는 듯하다. 무지일 수도 있고, 무관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헌신은 믿음을 만든다. 라치오가 재발 방지 약속을 지켜나간다면, 구단도, 팬도, 사건을 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할 테다. 어쨌든 안네 프랑크의 말대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차별 없는 스포츠맨십으로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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